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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유대열 (9) 위험 감수하고 달리는 기차 지붕에 목숨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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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소우 작성일19-08-15 03:17 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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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북한 벗어나야 추적 피한다 생각, 이틀 안에 국경 넘어가기로… 기차 환기통에 매달려 국경선 역까지유대열 목사(오른쪽 두번째)가 1997년 12월 강원도의 한 군부대에 안보 강의 차 방문했을 때의 모습.

북한을 떠나는 내게 제일 큰 문제는 이틀 안에 북한 영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단결근을 하면 즉시 행방을 추적하고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특별한 경력이 있기에 더 신속한 추적과 조사가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이틀 내로 압록강 국경도시인 자강도 만포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에서는 자기가 사는 시·군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안전부(경찰서)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추적과 조사를 피하고자 통행증을 발급받지 않았다. 이 경우 기차를 탈 수 없다. 하지만 기차를 타야 만포까지 하루 안에 갈 수 있기에 난 기관차 조종실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역전 표 내는 곳에서 통행증을 검열하는 안전원(경찰관)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면서 “손님을 배웅하러 잠깐 승강장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 길로 바로 기관차 조종실로 갔다. 노크하고 들어서자 쉰 살 가까운 기관사와 젊은 조수가 있었다. 놀란 그들에게 “이곳 시 행정경제위원회 지도원인데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러 평북 희천에 가는 중이다. 그런데 통행증을 발급받지 못해 할 수 없이 폐를 끼치게 됐으니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미리 준비해 간 좋은 음식과 돈도 조금 건넸다. 그렇게 오후 1시쯤 얻어 탄 기차는 북쪽을 향해 3시간 정도 달렸다. 중간에 김정은이 탄 ‘1호 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2시간이나 지연됐다. 예정보다 훨씬 지체된 저녁 7시가 넘어서 희천에 도착했다. 기차가 황해도 사리원 기관차대 소속이라 희천에서 기관차를 교체한 뒤, 기관사는 사리원으로 복귀해야 했다. 나는 조종실에서 내려 객차 안 화장실 칸에 숨어들었다.

여기서 오래 있을 수는 없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집을 떠나며 추억이 될 만한 사진 몇 장과 물건 몇 가지를 배낭에 넣고 나왔는데, 검문에 걸리면 내가 탈북하려는 게 탄로 날 것은 분명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사진을 잘게 찢어 밖으로 버렸다. 소지했던 물건도 모두 버렸다. 그때 모든 걸 버리다 보니 지금 내겐 고향을 추억할 만한 사진 한 장, 물건 한 점이 없다. 지금도 그때 너무 떨지 말고 사진 몇 장이라도 끝까지 갖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달리는 기차의 객실 문을 열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검문 안전원들에게 체포되지 않으려면 위험해도 기차 지붕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붕에 있는 객실 환기통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납작 엎드렸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차가 역전에 들어서 정차할 때 경비대원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1호 열차’로 인해 시간이 지연됐기에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결국 ‘1호 열차’ 통과가 나의 탈북을 도운 셈이다. 조명시설이 좋지 않은 북한의 역사도 나의 탈북을 도왔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기차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경비병이 있었는데 그들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기차 지붕 환기통에 매달린 채 5시간 정도를 더 갔다. 이윽고 만포역이 희미하게 보이자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만포역은 국경선 역이라 다른 곳보다 경비가 몇 배나 삼엄했다.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만포 시내로 들어갔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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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후 첫 주일에 선포장공 김재준 목사가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 국민일보DB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새 나라의 국토개발은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교육정책 수립이 최우선입니다. 의무교육도 필요합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누진세를 부담해야죠.”

장공 김재준(1901~1987) 목사가 1945년 8월 19일 기독 청년들에게 선포했던 건국의 구상이다. 당시 김 목사는 조선신학원 원장이었다. 이날은 광복 후 첫 주일이었다. 김 목사는 선린형제회 회원들에게 ‘기독교의 건국이념’을 주제로 새 나라의 청사진을 펼쳤다. 모임은 사실상 예배였다. 같은 해 12월 김 목사는 선린형제회를 모태로 서울 경동교회를 창립했다.

이날 강연은 단행본으로 출판됐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동안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던 책을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가 2017년 경기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동인 장로) 서고에서 발견했다. 임 교수는 ‘1945년 8·15광복, 건국의 이정표를 제시한 장로교회 신학자들’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이 내용을 소개했다.

김재준 목사가 1945년 8월 19일 선린형제회 집회에서 선포했던 ‘기독교의 건국이념’ 단행본 표지. 임희국 교수 제공
김 목사가 꿈꿨던 새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주 공화정 국가를 꿈꿨다. 국토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규정했다. 그는 “땅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도로 상가 공장 주택 관공서 학교의 배치도를 그리되 산과 들의 아름다움을 자연 그대로 보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풍부한 지하자원은 정부와 민간이 협력 개발해 공업화를 추진하고 국토개발을 국외자본에 맡기지 말고 외국인 토지 소유를 제한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교육정책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초등학교 6년, 중등학교 4년 의무교육 필요성도 이런 이유에서 제안했다. 일제강점기 국가주의 교육은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학교는 하나님의 통치를 망각한 채 국가 봉공을 위한 부품을 양산하는 공장이었다”면서 “국가주의를 주입하는 교육은 절대 되살아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정교분리 원칙도 강조했다. 김 목사는 “교회는 신적 기관으로 정부가 교회의 자유와 자치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교회도 정치에 직접 개입해선 안 된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부의 정의로운 분배’도 새 나라의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부자에게 누진세를 부과하고 대재벌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면서 “부자들이 소작인과 노동자의 교육비와 의료비를 책임질 수 있는 세금정책을 펴라”고 주문했다.

일제강점기의 군대를 기반으로 창군하라고 한 점과 친일 전력자 ‘대사면’을 제안한 건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임 교수는 14일 “값싼 용서가 아니라 친일부역자들이 통절한 회개를 할 경우 사면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면서 “세리 삭개오가 회개하며 토색한 게 있다면 4배 갚겠다고 한 것과 같은 회개가 대사면의 전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 목사가 품었던 새 나라에 대한 청사진은 1945년 9월 8일부터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 논의도 하지 못한 채 무위로 돌아갔다.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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